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국 동맹 전쟁 (문단 편집) === 종전 === [youtube(uLr_oYFO210)] 1870년 3월 1일 로페즈 대통령은 파라과이 북부 세로 코라(Cerro Corá) 밀림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겨우 포위망을 탈출한 후 같이 포위망을 탈출한 병사들이 지원병을 구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브라질 제국군 총사령관 주제 안토니우 코헤이아 다 카마라(José Antônio Correia da Câmara) 공작[* 1869년까지 카시아스 공작이었다가 카시아스 공작이 지쳤다는 이유로 그만뒀고, 바로 그 자리를 외 백작이 이어받았다가 피리베부이, 아코스타 뉴 전투에서의 학살 명령으로 인한 제국군 내부, 본국에서의 여론 악화에 따른 비난에 병까지 겹쳐 1년도 못 채우고 1870년 초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이 호위 병력 몇 명만 데리고 로페스 앞에 나타나 "신변을 보장해 줄 테니 항복하라."고 마지막 제안을 했지만 로페스 대통령은 이전에 했던 대통령령과 똑같이 '''"[[유언/실존인물/서양|조국과 같이 죽으리라!(¡Muero con mi patria!)]]"'''라 외치면서 카마라 장군에게 덤벼들었고 장군을 보호하려던 브라질 육군 병력이 발포하여 바로 사살당했다. 전사할 당시 로페스의 나이는 만 42살이었다.[* 로페스야 3국 동맹 조약의 내용을 알고 있던 데다 이미 파라과이에는 3국 동맹 말을 듣는 괴뢰정부도 만들어져서 자기를 죽이려는데 당연히 제국군 총사령관 말을 믿을 리가 없으니 그냥 죽으려고 달려드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총사령관 카마라 공작은 로페스를 죽일 생각은 없고 그냥 생포할 생각으로 부하 몇 명만 데리고 간건데 로페스가 항복을 거부하자 무장해제 명령을 내렸는데 로페스가 칼을 들고 달려드니까 부하들이 자기 장군을 지키려고 총을 쏴서 로페스가 죽은 것이었다. 근데 저때 총사령관이 살리긴 했어도 로페스 반대파가 세운 임시정부 혹은 로페스를 끝장내고 싶어했던 페드루 2세가 사형을 선고할 확률은 100%였다. 어찌 카마라 공작의 말처럼 살아남은 후 기적적으로 대통령직, 행정부 유지는 가능하다 쳐도 대전쟁에서 패하고 권력도 잃어버린 독재자의 신세는 어차피 파멸뿐이었으니 로페스 입장에서는 그저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사실상의 자살이었다.]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세로 코라에서 로페스에게 남은 부하는 400여명 정도밖에 없었고 그를 잡기 위해 온 브라질 육군은 4,000명에 달했으니 사실상 죽기 직전 마지막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최후까지 로페스 대통령과 함께 총을 쏴 가며 항전하던 영부인 엘리사 린치[* [[https://en.wikipedia.org/wiki/Eliza_Lynch|엘리사 린치]](Eliza Lynch, 1835~1886). 아일랜드인으로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프랑스로 이민해서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가 프랑스 군의관과 결혼하고 한 번 이혼한 뒤 당시 프랑스 주재 파라과이 대사로 부임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와 만나 재혼하고 파라과이로 들어왔으며, 이후 파라과이에 프랑스식 요리, 패션, 놀이, 문학, 음악, 미술 등을 들여와서 수도 아순시온의 문화를 크게 활성화시키고 여학교도 세워 파라과이 여성의 교육에도 큰 공헌을 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었다. 3국 동맹 전쟁 당시에는 여자들로 이뤄진 "Las Residentas" 라는 집단을 만들어 후방에서 군대를 지원했으며 때때로 아예 최전방에서 파라과이군을 직접 지휘하고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현대 파라과이 역사에서는 엘리사를 파라과이의 [[여걸]], [[국모]]로 기리고 있지만 다른 남미 역사에서는 좋게 봐야 파라과이의 [[에바 페론]] 정도고 나쁘게 보는 경우는 '''파라과이의 대마녀, 탐욕의 [[창녀]]'''라는 평가를 내린다. 남미 역사토론에서 파라과이 전쟁을 주제로 할 경우 100% 키배와 병림픽의 헬게이트가 열리는 인물이다.]는 죽지는 않았지만 브라질 제국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이후 파라과이 임시정부와 브라질 제국이 열었던 전범재판에서 국외 추방 판결을 받고 프랑스 파리에서 쓸쓸히 죽었다.[* 페드루 2세, 브라질 제국군, 파라과이 임시정부는 영부인 린치도 사형에 처하려고 했지만 린치는 영국 시민권자임을 내세웠기 때문에 국외 추방으로 그쳤다. 이후에 린치는 국외 추방명령 항소, 재산 반환청구 소송, 회고록 출판 때문에 잠깐동안 파라과이에 들른 적은 있다.] 파라과이 육군 장교로 복무중인 로페스의 장남 후안 프란시스코 "판치토" 로페스도 이 마지막 전투에서 싸우다가 몰려 항복 권유를 받았는데 "파라과이군 장교에게 항복이란 없다"며 저항하다 죽었다. 아들이 총에 맞아 죽는 걸 바로 앞에서 본 린치는 아들의 시신을 껴안고 통곡하며 제국군에게 '''"이것이 당신들이 말한 문명인가?"'''라고 항의했다. 3국 동맹은 전쟁의 명분으로 "폭군의 압제로부터 파라과이를 해방시키고, 자유와 문명을 이곳에 전파한다"고 선전했다. 전쟁이 끝나고 로페스와 맏아들의 시신은 영부인과 작은아들들이 직접 땅을 파서 묻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